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인란트 재무장 (문단 편집) == [[나치 독일|독일]]의 행동 == [[1936년]] [[2월]], 히틀러는 외무부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군부에 라인란트 재무장의 뜻을 밝혔다. 군부는 국방장관이며 군부의 1인자인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 원수를 중심으로 한 세력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결사반대하였는데, '''우리도 라인란트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프랑스가 쳐들어오는데 절대 못 막는다'''가 핵심 반대 논조였다. 군부에게도 라인란트 재무장은 숙원 중의 숙원이었으나 최소한 이들은 현실적인 감각은 충분했다. 외무부에서도 군부 만큼은 아니지만 반대 기류가 강했는데, 베르사유 조약 파기로 분위기가 형성되어 몇 년 지나면 외교적으로 기회가 올 수 있는 상황에서 괜히 서두르다간 역풍만 맞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반대에도 히틀러는 프랑스는 겁이 많고 나약해서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밀어붙였다. 결국 군부는 타협하여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내고, 만약 프랑스가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면 즉각 철수하고 화해 신호를 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독일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도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미 1935년 [[대영제국|영국]] 및 프랑스 외교관들과의 접견에서 '''“아, 님들 내가 실수했음. 베르사유 조약 파기하면서 라인란트도 같이 원래대로 돌렸어야 했는데 까비까비”'''하면서 떠 보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영-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제국|에티오피아]] 침략을 해결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기에, 히틀러의 예상대로 라인란트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영국에서는 [[1936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이후인 [[10월]] 즈음에 독일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그들은 독일이 외교를 통해 라인란트를 재무장할 것이라 여겼지 군사적인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군대를 라인란트로 진입시켰다. 히틀러와 군부의 타협대로 투입한 병력은 [[독일 국방군|독일군]] 22,000명, 지역 경찰 14,000명이었다. 그 중 3,000여 명만이 [[라인 강]]을 건너고, 나머지 27,000여 명은 라인 강 동쪽의 비무장지대에 머물렀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대응할 경우 즉각 비무장지대를 벗어나기로 되어 있었다.'''[* 즉 프랑스가 군대를 움직였다면 이후로 히틀러가 더욱 강경하게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 찬스였다.] 히틀러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인란트 진입을 강행한 것은 바로 [[이탈리아 왕국]]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1935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1차 대전]] 승전국의 공조체제에 따르고 있었으나,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에 대한 영프이 3국 공동대응체제인 [[스트레사 체제]]는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무너졌다. 이에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영국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패전국인 독일의 재군비마저 허용되는데 '''승전국인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는 용납하겠지?'''란 생각으로 [[에티오피아 제국|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라인란트 문제에 공동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티오피아 침략]]이 성공리에 끝나가자, 이후 이탈리아가 다시 대독 공동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침략이 채 마무리되기 직전인 [[1936년]] [[3월]] 초에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진주를 시작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